· 소장품설명조선 전기 세종대와 중기 인조대에 법화(法貨)로 주조, 유통된 주화(鑄貨, 銅錢)이다. 1425년(세종 7년)에 주조된 동전으로서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동전이지만 유통은 그리 활발하지 못했다. 조선통보(朝鮮通寶)가 주조된 것은 액면가치가 큰 저화만으로는 소액거래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이때 발행된 동전이 바로 해서체의 ‘조선통보’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으로서 중국 동전에 비해 손색이 없고 매우 정교하였다. 발행 당시 저화를 고액거래에, 그리고 조선통보를 소액거래에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1425년 조정에서는 그때까지 사용되던 저화 대신 동전만을 사용하게 하고 저화 1장에 조선통보 1문을 교환해주었다. 조선통보의 교환가치는 발행 초에 면포 1필당 20여 문이었으나 2년 뒤인 1425년 6월에는 300~400문으로 하락했다. 정부는 이러한 동전의 가치하락이 공급과잉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동전 공급을 중지했으나, 그 원인이 명목가치가 실질가치보다 높은 데서 생긴 것이었기 때문에 도리어 조선통보에 대한 불신감만 조장되었다. 당시 동전의 주요 원료인 구리[銅]는 주로 일본에서 수입하는 처지였으므로 동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때문에 1423년 11월~1427년 1월 사이 동전주조의 총액은 약 40만 냥에 불과했고, 이 중에서 시중에 유통된 것은 10만 냥뿐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동전이 화폐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양이었다. 민간에서보다 조정이나 고관집 등에서 널리 사용된 조선통보는 1445년(세종 27년) 이후 저화의 재발행으로 인해 버림받는 처지가 되었다가 1633년(인조 11년)에 팔분서체로 다시 주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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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보(朝鮮通寶)
안동시립민속박물관
명칭조선통보(朝鮮通寶)
국적/시대한국 - 조선
분류산업/생업 - 상업 - 화폐 - 엽전
재질금속 - 동합금
특징조선 전기 세종대와 중기 인조대에 법화(法貨)로 주조, 유통된 주화(鑄貨, 銅錢)이다. 1425년(세종 7년)에 주조된 동전으로서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동전이지만 유통은 그리 활발하지 못했다. 조선통보(朝鮮通寶)가 주조된 것은 액면가치가 큰 저화만으로는 소액거래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이때 발행된 동전이 바로 해서체의 ‘조선통보’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으로서 중국 동전에 비해 손색이 없고 매우 정교하였다. 발행 당시 저화를 고액거래에, 그리고 조선통보를 소액거래에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1425년 조정에서는 그때까지 사용되던 저화 대신 동전만을 사용하게 하고 저화 1장에 조선통보 1문을 교환해주었다. 조선통보의 교환가치는 발행 초에 면포 1필당 20여 문이었으나 2년 뒤인 1425년 6월에는 300~400문으로 하락했다. 정부는 이러한 동전의 가치하락이 공급과잉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동전 공급을 중지했으나, 그 원인이 명목가치가 실질가치보다 높은 데서 생긴 것이었기 때문에 도리어 조선통보에 대한 불신감만 조장되었다. 당시 동전의 주요 원료인 구리[銅]는 주로 일본에서 수입하는 처지였으므로 동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때문에 1423년 11월~1427년 1월 사이 동전주조의 총액은 약 40만 냥에 불과했고, 이 중에서 시중에 유통된 것은 10만 냥뿐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동전이 화폐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양이었다. 민간에서보다 조정이나 고관집 등에서 널리 사용된 조선통보는 1445년(세종 27년) 이후 저화의 재발행으로 인해 버림받는 처지가 되었다가 1633년(인조 11년)에 팔분서체로 다시 주조되었다
크기지름 2.6cm
소장품번호
기증
3239
촬영연도
0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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