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포 묘지명

국립중앙박물관

원본 해상도 3000 * 2254


  • 명칭윤포 묘지명
  • 다른명칭尹誧墓誌銘
  • 국적/시대한국 - 고려
  • 분류사회생활 - 의례생활 - 상장 - 묘지
  • 재질
  • 크기가로 86cm, 세로 50.5cm
  • 소장품번호 신수 5864

제 1유형 : 출처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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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卒高麗國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檢校大師守司徒尙書左僕射叅知政事判尙書工部事柱國贈諡烈靖公墓誌銘幷序
寶文閣校勘文林郞尙食奉御同正黃文通, 撰.
公姓尹, 諱誧, 字未詳, 舊名諧. 其先春州橫川縣人, 功臣新福六世內孫, 大祖六世外孫也.
皇曾祖諱守玄, 追封工部尙書, 皇祖諱修己, 追封右僕射戶部尙書上將軍, 皇考諱祚明, 追封右僕射行刑部郞中兼大子中舍人. 外祖諱庾說, 檢校大子詹事, 本功臣黔弼之後也. 公年八歲丁父憂, 十歲丁母憂, 依姊居.
越文宗大康十年甲子, 國子祭酒金公覲門下, 中南宮試. 是時, 宋元豊五年也. 至宣宗大安四年戊辰, 相國崔公思諏·崔公奭下, 登進士第, 屬內侍. 六年庚午, 拜秘書校書郞. 肅宗壽昌五年己卯, 轉直史館, 未就, 尋轉權直翰林院. 乾統三年癸未, 以殿中內給事, 出知靈嵒郡, 理爲第一, 按部以褒狀聞于朝. 七年丁亥, 拜試閤門祗候. 睿宗天慶二年壬辰, 以戶部員外郞, 出守廣州牧居. 三年春, 以禮部員外郞, 知茶房事. 還累遷禮部侍郞寶文閣直學士知制誥, 宋宣和四年壬寅也.
明年, 仁宗命公注『貞觀政要』以進屬. 丙午春, 大內火, 公抗身衛社, 功載大史. 丁未春, 提擧南省試, 取進士明經一百餘人. 其間銳於登仕者, 如內侍大府少卿徐淳·禮賓少卿兼御史雜端韓靖. 相次而達者, 高子思·許勢脩·李唐仁·崔仲居·張令卿·金承溫·陳玄光, 皆當世聞人也. 壬子夏, 以金紫光祿大夫守司空尙書左僕射判工部事, 致仕. 癸丑秋八月, 奉王旨, 撰集古詞三百首, 名『唐宋樂章』一部. 又於大金皇統六年, 纂『大平廣記撮要詩一百首』, 隨表進呈. 上敎遣知奏事崔惟淸奬諭曰 “卿年高, 聰明藻思如新, 嘉歎不忘.”
其年冬十有二月, 加檢校大師守司徒叅知政事柱國. 又據唐玄裝法師西域記, 撰進「五天竺國圖」. 上覽之, 賜燕糸七束. 仍命右承宣金存中, 諮問樂譜, 其遭遇之盛, 千載一時歟.
公平生倜儻有大節. 敏於文學, 達於政事. 該通音律, 尤工歌詞. 晩年嘗讀內典, 再赴閤門養老宴, 親獻手寫『法華經』一軸, 上乃宣權, 仍賜物尤渥.
貞元二年甲戌秋七月十六日丁卯, 病革, 翛然而化, 春秋九十二. 上爲之震悼, 贈諡烈靖公, 命有司監護喪事. 是年八月三日甲申, 葬于京東法雲山之麓.
公之夫人王氏, 卒. 生五男三女. 長試閤門祗候永濬, 次重太師警韶, 次進士永洙, 與三女, 皆先亡. 次殿中內給事同正永湜, 季禮賓注簿同正永源. 永濬·永源以異才擢第春官, 可謂肯堂矣. 永濬已沒, 永源今不逮祿養, 良可歎夫.
其銘曰. 噫公之德, 邦家之光, 歷事六聖, 柱石廟堂. 芝蘭馥馥, 金玉琅琅, 惟仁故靜, 厥壽乃長. 解組而退, 二紀于玆, 上曰元老, 擢寘宰司. 終始惟一, 大節險夷. 逝川難住, 今也胡爲. 傳億萬祀, 令聞四馳.

번역문


돌아가신 고려국(高麗國)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사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상서공부사 주국(三重大匡 開府儀同三司 檢校大師 守司徒 尙書左僕射 叅知政事 判尙書工部事 柱國)이자 추증받은 시호 열정공(烈靖公, 윤포)의 묘지명(墓誌銘) 병서(幷序)
보문각교감 문림랑 상식봉어동정(寶文閣校勘 文林郞 尙食奉御同正) 황문통(黃文通) 지음.
공의 성은 윤(尹)이고, 이름은 포(誧)이며, 자(字)는 알지 못하고, 옛 이름은 해(諧)이다. 그 선조는 춘주(春州) 횡천현(橫川縣) 사람으로, 공신(功臣) 윤신복(尹新福)의 6대 내손(內孫)이며, 태조의 6대 외손(外孫)이다.
증조할아버지 윤수현(尹守玄)은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추봉(追封)되었고, 할아버지 윤수기(尹修己)는 우복야 호부상서 상장군(右僕射 戶部尙書 上將軍)으로 추봉되었으며, 아버지 윤조명(尹祚明)은 우복야 행형부낭중 겸 태자중사인(右僕射 行刑部郞中 兼 大子中舍人)으로 추봉되었다. 외할아버지 유설(庾說)은 검교태자첨사(檢校大子詹事)로, 본래 공신 유금필(庾黔弼)의 후손이다. 공은 나이 8세에 부친상을 만나고[丁父憂], 10세에 모친상을 만났으니[丁母憂], 누이에게 의지하여 살았다.
문종 대강(大康) 10년 갑자(선종 원년, 1084)에 국자좨주(國子祭酒) 김근(金覲) 공의 문하(門下)에서 남궁시(南宮試)에 합격하였다. 이때는 송(宋) 원풍(元豐) 5년(문종 36년, 1082)이었다. 선종 대안(大安) 4년 무진(선종 5년, 1088)에 이르러 상국(相國) 최사추(崔思諏)·최석(崔奭)의 아래에서 진사시[進士第]에 급제하여 내시(內侍)에 속하였다. 6년 경오년(선종 7년, 1090)에 비서교서랑(秘書校書郞)에 임명되었다. 숙종 수창(壽昌) 5년 기묘(숙종 4년, 1099)에 직사관(直史館)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하기도 전에 곧이어 권직한림원(權直翰林院)에 임명되었다. 건통(乾統) 3년 계미(숙종 8년, 1103)에는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서 나가서 영암군(靈嵒郡)의 지방관이 되었는데, 다스림이 제일이었으므로 안부(按部)가 치적을 칭찬하는 문서[褒狀]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건통〉 7년 정해(예종 2년, 1107)에 시합문지후(試閤門祗候)에 임명되었다. 예종 천경(天慶) 2년 임진(예종 7년, 1112)에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으로 나가서 광주목(廣州牧)의 수령이 되어 머물렀다. 〈천경〉 3년(예종 8년, 1113) 봄에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지다방사(知茶房事)가 되었다. 〈서울로〉 돌아와 여러 번 옮겨 예부시랑 보문각직학사 지제고(禮部侍郞 寶文閣直學士 知制誥)가 되었으니, 송(宋) 선화(宣和) 4년 임인(예종 17년, 1122)이다.
이듬해, 인종이 공으로 하여금 『정관정요(貞觀政要)』에 주석을 달고 올리도록 명하였다. 병오년(인종 4년, 1126) 봄에 대궐[大內]에 불이 나자 〈공이〉 몸으로 막으면서 사직을 호위하였으니, 공(功)이 대사(大史)에 실렸다. 정미년(인종 5년, 1127) 봄에 남성시(南省試)의 제거(提擧)가 되어 진사(進士)와 명경(明經) 1백여 명을 선발하였다. 그중에서 관직에 오른 후 빠르게 승진한 자로는 내시 대부소경(內侍 大府少卿) 서순(徐淳)·예빈소경 겸 어사잡단(禮賓少卿 兼 御史雜端) 한정(韓靖)과 같은 이가 있었다. 잇달아 현달한 자로는 고자사(高子思)·허세수(許勢脩)·이당인(李唐仁)·최중거(崔仲居)·장영경(張令卿)·김승온(金承溫)·진광현(陳玄光)이 있었으니, 모두 당시의 이름난 사람들이었다. 임자년(인종 10년, 1132) 여름에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상서좌복야 판공부사(金紫光祿大夫 守司空 尙書左僕射 判工部事)로 치사(致仕)하였다.
계축년(인종 11년, 1133) 가을 8월에 임금의 뜻을 받들어 고사(古詞) 3백 수를 가려 모아 『당송악장(唐宋樂章)』 1부(部)를 만들었다. 또 금[大金] 황통(皇統) 6년(인종 24년, 1146)에 『태평광기촬요시일백수(大平廣記撮要詩一百首)』를 편찬하고, 표(表)와 함께 바쳤다. 임금이 지주사(知奏事) 최유청(崔惟淸)을 보내어 칭찬하며 말하기를, “경은 나이가 많은데도 총명함과 글 짓는 재주[藻思]가 신진과 같으니, 매우 가상하여 잊을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그해 겨울 12월에 검교태사 수사도 참지정사 주국(檢校大師 守司徒 叅知政事 柱國)을 더하였다. 또 당(唐) 현장법사(玄裝法師) 서역기(西域記)에 의거하여 「오천축국도(五天竺國圖)」를 지어 바쳤다. 임금께서 그것을 열람하시고, 연사(燕糸) 7속(束)을 내려주셨다. 이어서 우승선(右承宣) 김존중(金存中)에게 명하여 악보(樂譜)를 자문(諮問)케 하였으니, 그 〈군신이〉 만나는 성대함은 천년에 한 번 있을 것이다.
공은 평소에 기개가 뛰어나고 지조가 있었다. 문학(文學)에 민첩하고 정사(政事)에 통달하였다. 음율(音律)에 해박하였으며 특히 가사(歌詞)에 공교하였다. 만년에는 항상 불경[內典]을 읽었는데, 다시 합문양로연(閤門養老宴)에 나아가 직접 손수 베낀 『법화경(法華經)』 한 두루마리를 헌상하였으니, 임금께서 이에 중히 여기셨으며[宣權], 인하여 물건을 내려주심이 더욱 두터웠다.
정원(貞元) 2년 갑술(의종 8년, 1154) 가을 7월 16일 정묘에 병이 위독해져서 홀연히 돌아가셨으니, 춘추 92세였다. 임금께서 슬퍼하시며 시호를 추증하여 열정공(烈靖公)이라 하였고, 담당 관청에게 명하여 상 치르는 일을 돌보라고 명하였다. 이해 8월 3일 갑신에 서울 동쪽 법운산(法雲山) 기슭에 장사지냈다.
공의 부인 왕씨(王氏)도 돌아가셨다. 5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은 시합문지후(試閤門祗候) 윤영준(尹永濬)이고, 차남은 중태사(重太師) 경소(警韶)이고, 3남은 진사(進士) 윤영수(尹永洙)인데, 3명의 딸과 함께 모두 〈공보다〉 먼저 죽었다. 4남은 전중내급사동정(殿中內給事同正) 윤영식(尹永湜)이고, 막내는 예빈주부동정(禮賓注簿同正) 윤영원(尹永源)이다. 윤영준과 윤영원은 뛰어난 재주로 과거[春官]에 급제하였으니, 아버지의 업을 이었다고[肯堂] 할 만하다. 윤영준은 이미 죽었고, 윤영원은 지금 녹봉을 받고 있지 못하니[不逮祿養], 참으로 한탄할 만하다.
그 명(銘)에 이른다.
아! 공의 덕은 나라[邦家]의 빛이었으니,
여섯 임금을 두루 섬기며 묘당(廟堂)의 주춧돌 되셨네.
향초처럼 향기롭고 쇠와 옥처럼 낭랑하니,
어진 까닭에 고요하여 그 수명도 길었구나.
관복의 끈을 풀어 물러나고도 이에 20여 년[二紀] 지내시니,
임금께서 원로(元老)라 하시며 재상직[宰司]에 두셨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한결같았고, 험난함과 평탄함에도 큰 절개 〈지키셨네.〉
흘러가는 냇물 머무르게 하기 어려우니, 이제는 어떻게 하겠는가.
억만(億萬) 후손에게 전해져, 아름다운 명성 사방으로 내달릴 것이네.
- 번역자: 현수진

원문


卒高麗國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檢校大師守司徒尙書左僕射叅知政事判尙書工部事柱國贈諡烈靖公墓誌銘幷序
寶文閣校勘文林郞尙食奉御同正黃文通, 撰.
公姓尹, 諱誧, 字未詳, 舊名諧. 其先春州橫川縣人, 功臣新福六世內孫, 大祖六世外孫也.
皇曾祖諱守玄, 追封工部尙書, 皇祖諱修己, 追封右僕射戶部尙書上將軍, 皇考諱祚明, 追封右僕射行刑部郞中兼大子中舍人. 外祖諱庾說, 檢校大子詹事, 本功臣黔弼之後也. 公年八歲丁父憂, 十歲丁母憂, 依姊居.
越文宗大康十年甲子, 國子祭酒金公覲門下, 中南宮試. 是時, 宋元豊五年也. 至宣宗大安四年戊辰, 相國崔公思諏·崔公奭下, 登進士第, 屬內侍. 六年庚午, 拜秘書校書郞. 肅宗壽昌五年己卯, 轉直史館, 未就, 尋轉權直翰林院. 乾統三年癸未, 以殿中內給事, 出知靈嵒郡, 理爲第一, 按部以褒狀聞于朝. 七年丁亥, 拜試閤門祗候. 睿宗天慶二年壬辰, 以戶部員外郞, 出守廣州牧居. 三年春, 以禮部員外郞, 知茶房事. 還累遷禮部侍郞寶文閣直學士知制誥, 宋宣和四年壬寅也.
明年, 仁宗命公注『貞觀政要』以進屬. 丙午春, 大內火, 公抗身衛社, 功載大史. 丁未春, 提擧南省試, 取進士明經一百餘人. 其間銳於登仕者, 如內侍大府少卿徐淳·禮賓少卿兼御史雜端韓靖. 相次而達者, 高子思·許勢脩·李唐仁·崔仲居·張令卿·金承溫·陳玄光, 皆當世聞人也. 壬子夏, 以金紫光祿大夫守司空尙書左僕射判工部事, 致仕. 癸丑秋八月, 奉王旨, 撰集古詞三百首, 名『唐宋樂章』一部. 又於大金皇統六年, 纂『大平廣記撮要詩一百首』, 隨表進呈. 上敎遣知奏事崔惟淸奬諭曰 “卿年高, 聰明藻思如新, 嘉歎不忘.”
其年冬十有二月, 加檢校大師守司徒叅知政事柱國. 又據唐玄裝法師西域記, 撰進「五天竺國圖」. 上覽之, 賜燕糸七束. 仍命右承宣金存中, 諮問樂譜, 其遭遇之盛, 千載一時歟.
公平生倜儻有大節. 敏於文學, 達於政事. 該通音律, 尤工歌詞. 晩年嘗讀內典, 再赴閤門養老宴, 親獻手寫『法華經』一軸, 上乃宣權, 仍賜物尤渥.
貞元二年甲戌秋七月十六日丁卯, 病革, 翛然而化, 春秋九十二. 上爲之震悼, 贈諡烈靖公, 命有司監護喪事. 是年八月三日甲申, 葬于京東法雲山之麓.
公之夫人王氏, 卒. 生五男三女. 長試閤門祗候永濬, 次重太師警韶, 次進士永洙, 與三女, 皆先亡. 次殿中內給事同正永湜, 季禮賓注簿同正永源. 永濬·永源以異才擢第春官, 可謂肯堂矣. 永濬已沒, 永源今不逮祿養, 良可歎夫.
其銘曰. 噫公之德, 邦家之光, 歷事六聖, 柱石廟堂. 芝蘭馥馥, 金玉琅琅, 惟仁故靜, 厥壽乃長. 解組而退, 二紀于玆, 上曰元老, 擢寘宰司. 終始惟一, 大節險夷. 逝川難住, 今也胡爲. 傳億萬祀, 令聞四馳.

번역문


돌아가신 고려국(高麗國)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사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상서공부사 주국(三重大匡 開府儀同三司 檢校大師 守司徒 尙書左僕射 叅知政事 判尙書工部事 柱國)이자 추증받은 시호 열정공(烈靖公, 윤포)의 묘지명(墓誌銘) 병서(幷序)
보문각교감 문림랑 상식봉어동정(寶文閣校勘 文林郞 尙食奉御同正) 황문통(黃文通) 지음.
공의 성은 윤(尹)이고, 이름은 포(誧)이며, 자(字)는 알지 못하고, 옛 이름은 해(諧)이다. 그 선조는 춘주(春州) 횡천현(橫川縣) 사람으로, 공신(功臣) 윤신복(尹新福)의 6대 내손(內孫)이며, 태조의 6대 외손(外孫)이다.
증조할아버지 윤수현(尹守玄)은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추봉(追封)되었고, 할아버지 윤수기(尹修己)는 우복야 호부상서 상장군(右僕射 戶部尙書 上將軍)으로 추봉되었으며, 아버지 윤조명(尹祚明)은 우복야 행형부낭중 겸 태자중사인(右僕射 行刑部郞中 兼 大子中舍人)으로 추봉되었다. 외할아버지 유설(庾說)은 검교태자첨사(檢校大子詹事)로, 본래 공신 유금필(庾黔弼)의 후손이다. 공은 나이 8세에 부친상을 만나고[丁父憂], 10세에 모친상을 만났으니[丁母憂], 누이에게 의지하여 살았다.
문종 대강(大康) 10년 갑자(선종 원년, 1084)에 국자좨주(國子祭酒) 김근(金覲) 공의 문하(門下)에서 남궁시(南宮試)에 합격하였다. 이때는 송(宋) 원풍(元豐) 5년(문종 36년, 1082)이었다. 선종 대안(大安) 4년 무진(선종 5년, 1088)에 이르러 상국(相國) 최사추(崔思諏)·최석(崔奭)의 아래에서 진사시[進士第]에 급제하여 내시(內侍)에 속하였다. 6년 경오년(선종 7년, 1090)에 비서교서랑(秘書校書郞)에 임명되었다. 숙종 수창(壽昌) 5년 기묘(숙종 4년, 1099)에 직사관(直史館)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하기도 전에 곧이어 권직한림원(權直翰林院)에 임명되었다. 건통(乾統) 3년 계미(숙종 8년, 1103)에는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서 나가서 영암군(靈嵒郡)의 지방관이 되었는데, 다스림이 제일이었으므로 안부(按部)가 치적을 칭찬하는 문서[褒狀]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건통〉 7년 정해(예종 2년, 1107)에 시합문지후(試閤門祗候)에 임명되었다. 예종 천경(天慶) 2년 임진(예종 7년, 1112)에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으로 나가서 광주목(廣州牧)의 수령이 되어 머물렀다. 〈천경〉 3년(예종 8년, 1113) 봄에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지다방사(知茶房事)가 되었다. 〈서울로〉 돌아와 여러 번 옮겨 예부시랑 보문각직학사 지제고(禮部侍郞 寶文閣直學士 知制誥)가 되었으니, 송(宋) 선화(宣和) 4년 임인(예종 17년, 1122)이다.
이듬해, 인종이 공으로 하여금 『정관정요(貞觀政要)』에 주석을 달고 올리도록 명하였다. 병오년(인종 4년, 1126) 봄에 대궐[大內]에 불이 나자 〈공이〉 몸으로 막으면서 사직을 호위하였으니, 공(功)이 대사(大史)에 실렸다. 정미년(인종 5년, 1127) 봄에 남성시(南省試)의 제거(提擧)가 되어 진사(進士)와 명경(明經) 1백여 명을 선발하였다. 그중에서 관직에 오른 후 빠르게 승진한 자로는 내시 대부소경(內侍 大府少卿) 서순(徐淳)·예빈소경 겸 어사잡단(禮賓少卿 兼 御史雜端) 한정(韓靖)과 같은 이가 있었다. 잇달아 현달한 자로는 고자사(高子思)·허세수(許勢脩)·이당인(李唐仁)·최중거(崔仲居)·장영경(張令卿)·김승온(金承溫)·진광현(陳玄光)이 있었으니, 모두 당시의 이름난 사람들이었다. 임자년(인종 10년, 1132) 여름에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상서좌복야 판공부사(金紫光祿大夫 守司空 尙書左僕射 判工部事)로 치사(致仕)하였다.
계축년(인종 11년, 1133) 가을 8월에 임금의 뜻을 받들어 고사(古詞) 3백 수를 가려 모아 『당송악장(唐宋樂章)』 1부(部)를 만들었다. 또 금[大金] 황통(皇統) 6년(인종 24년, 1146)에 『태평광기촬요시일백수(大平廣記撮要詩一百首)』를 편찬하고, 표(表)와 함께 바쳤다. 임금이 지주사(知奏事) 최유청(崔惟淸)을 보내어 칭찬하며 말하기를, “경은 나이가 많은데도 총명함과 글 짓는 재주[藻思]가 신진과 같으니, 매우 가상하여 잊을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그해 겨울 12월에 검교태사 수사도 참지정사 주국(檢校大師 守司徒 叅知政事 柱國)을 더하였다. 또 당(唐) 현장법사(玄裝法師) 서역기(西域記)에 의거하여 「오천축국도(五天竺國圖)」를 지어 바쳤다. 임금께서 그것을 열람하시고, 연사(燕糸) 7속(束)을 내려주셨다. 이어서 우승선(右承宣) 김존중(金存中)에게 명하여 악보(樂譜)를 자문(諮問)케 하였으니, 그 〈군신이〉 만나는 성대함은 천년에 한 번 있을 것이다.
공은 평소에 기개가 뛰어나고 지조가 있었다. 문학(文學)에 민첩하고 정사(政事)에 통달하였다. 음율(音律)에 해박하였으며 특히 가사(歌詞)에 공교하였다. 만년에는 항상 불경[內典]을 읽었는데, 다시 합문양로연(閤門養老宴)에 나아가 직접 손수 베낀 『법화경(法華經)』 한 두루마리를 헌상하였으니, 임금께서 이에 중히 여기셨으며[宣權], 인하여 물건을 내려주심이 더욱 두터웠다.
정원(貞元) 2년 갑술(의종 8년, 1154) 가을 7월 16일 정묘에 병이 위독해져서 홀연히 돌아가셨으니, 춘추 92세였다. 임금께서 슬퍼하시며 시호를 추증하여 열정공(烈靖公)이라 하였고, 담당 관청에게 명하여 상 치르는 일을 돌보라고 명하였다. 이해 8월 3일 갑신에 서울 동쪽 법운산(法雲山) 기슭에 장사지냈다.
공의 부인 왕씨(王氏)도 돌아가셨다. 5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은 시합문지후(試閤門祗候) 윤영준(尹永濬)이고, 차남은 중태사(重太師) 경소(警韶)이고, 3남은 진사(進士) 윤영수(尹永洙)인데, 3명의 딸과 함께 모두 〈공보다〉 먼저 죽었다. 4남은 전중내급사동정(殿中內給事同正) 윤영식(尹永湜)이고, 막내는 예빈주부동정(禮賓注簿同正) 윤영원(尹永源)이다. 윤영준과 윤영원은 뛰어난 재주로 과거[春官]에 급제하였으니, 아버지의 업을 이었다고[肯堂] 할 만하다. 윤영준은 이미 죽었고, 윤영원은 지금 녹봉을 받고 있지 못하니[不逮祿養], 참으로 한탄할 만하다.
그 명(銘)에 이른다.
아! 공의 덕은 나라[邦家]의 빛이었으니,
여섯 임금을 두루 섬기며 묘당(廟堂)의 주춧돌 되셨네.
향초처럼 향기롭고 쇠와 옥처럼 낭랑하니,
어진 까닭에 고요하여 그 수명도 길었구나.
관복의 끈을 풀어 물러나고도 이에 20여 년[二紀] 지내시니,
임금께서 원로(元老)라 하시며 재상직[宰司]에 두셨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한결같았고, 험난함과 평탄함에도 큰 절개 〈지키셨네.〉
흘러가는 냇물 머무르게 하기 어려우니, 이제는 어떻게 하겠는가.
억만(億萬) 후손에게 전해져, 아름다운 명성 사방으로 내달릴 것이네.
- 번역자: 현수진